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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문학, 나의 취향

 

어린 시절부터의 내 평생의 취미는 단연 독서와 영화보기이다. 좀 자랑삼아 말하자면, 어린 시절 시골학교의 문고에 있는 책들을 다 읽어치우고는 더 읽을 게 없어 누이들의 중고등 국어교과서와 사촌 형님이 구독하는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까지 두루 섭렵했다.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안력이 약해지면서, 책읽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이제는 책을 보려면 돋보기안경을 써야 하는 처량한 나이가 되었다. 전에 직장생활 할 때, 보고서 글자 폰트를 큼직큼직하게 해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책읽기와 영화 취향도 바뀌어 간다. 무겁고 심각한 주제 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쪽으로. 젊은 시절의 지나친 독서 편식의 반작용인지, 아니면 생각이 점점 얕아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뼈저리게 겪고있는 고단한 현실과 암울한 세계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거나, 작가 자신의 철학을 강의하듯 늘어놓는 소설이나 영화는 영 내키지 않는다. 오늘의 주제는 그래서 나의 문학과 영화 취향.

 

 

나에게 이천년대 쓰여진 최고의 한국소설을 꼽으라면 천명관의 고래를 주저 없이 꼽겠다.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백년의 고독’에서 발원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우리의 민담과 만나는 접점에서 탄생한 서사문학의 기념비가 될 만한 작품이다. 천명관 작가는 이 소설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인지 이후의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고래'를 뛰어넘는 더 멋진 작품을 세상에 선 보일 날을 고대한다.

 

박완서 선생의 글은 잘 읽힌다. 독자가 편안하게 읽도록 탈고까지 여러 번 고쳐 쓴 글이 아닐까 싶다. 작고하시기 3년 전 출간한 그 남자네 집’에는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을 풀어 놓으셨다.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어쩌면 이런 감성을 가지셨을까, 천생 작가로구나 감탄하게 된다.

 

김훈 선생의 글은 요즘 보기 드문 독특한 문체의 맛이 있다. 간결하고 힘이 있다. ‘칼의 노래도 좋지만, ‘남한산성에서 문체의 맛이 더 돋보인다. 젊은 작가로는 박민규를 추천한다. 좋은 재능을 지닌 작가이다. ‘삼미 수퍼스타즈의 영원한 팬클럽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재미있게 읽었다. 기발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솜씨로는 법대 동문인 성석제 작가가 발군이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추천.

 

공지영의 초기 작품들은 좋아하지 않았는데, 작가도 나이가 드니 글이 좀 편안해져서 최근의 작품들은 읽을 만하다. 젊은 여류소설가로는 정유정이 묵직하다. 은희경이나 신경숙 등의 여류작가들은 내 취향은 아니다.

 

한국 최고 단편을 꼽는다면, 김승옥의 무진기행’. 무려 50여 년 전 내가 세상에 나올 무렵의 작품인데 지금 읽어보아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없이 신선하다. 김승옥은 해방 후 한국어로 교육받은 첫 세대이다.

 

 

 

 

근래 읽은 외국소설 중 단연 최고는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이다 (오래전 출간된 책이지만, 몇 년 전에야 뒤늦게 읽었다). 마꼰도라는 환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백년 동안의 역사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명명된 그의 독특한 서사기법으로 펼쳐 낸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조만간 좀 더 상세히 다루어 보려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 더 오래된 소설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꼽을 수 있겠다.

 

개미를 비롯한 베르베르의 소설들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일본소설들은 묘사가 한국인의 감각과 친근하고 번역이 깔끔한 편이어서 잘 읽힌다. 일본작가로는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 뒤를 이어 오쿠다 히데오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만약, 하루키를 대중소설가 쯤으로 여기시는 분이라면 그의 소설을 일단 읽어보시고 평가해 주길 바란다.

 

네이버에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가 있는데, 믿을 만한 분들이 가장 많이 추천한 책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대단한 명작을 놓친 기분이어서 뒤늦게 찾아 읽었다. 젊어서 읽었다면 울림이 컸겠는데, 이 나이에 읽으니 대단한 명작이라고는 못하겠다. 오히려, 후기에 실린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이윤기 선생의 크레타 섬 카잔차키스 묘소 방문기가 더 마음에 와 닿더라는. 작가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들면 작품세계는 편협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숭고한 진리라 할지라도. 작가는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비유와 상징으로 좀 더 명쾌하게 드러내고,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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