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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국수주의사관의 뿌리

국수주의사관의 뿌리

 

2016628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환단고기의 한 대목이라고 합니다.

요즘 세상에는 일베충과 더불어 환빠라는 무리가 있어요. 환빠는 환단고기라는 위서임이 거의 확실한 책에 근거를 두고 고대 한민족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사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말인데요. 저 역시 대학 1학년 때 쯤, 1979년에 출판된 그 책을 보고 미혹되었던 적이 있지요.

 

국수주의 사관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사학계의 만선일체 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본래 만주와 조선은 하나다라는 사관으로 대한제국 시기 일제 통감부와 일진회에서 주창한 간도 수복론에서 출발하여 이후 일본의 만주지배에 활용된 사관입니다. 광복 후에는 주로 만주국 군인출신 들이 많이 인용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일제의 식민지지배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친일사학의 맥을 잇는 강단사학계가 주류를 형성하고, 단재 신채호선생 정인보선생 등에 의해 연구되던 민족주의 사학은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 환단고기 입니다. 환단고기는 주체적사관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으나, 사실과 허구가 혼재된 지나친 논리비약 등으로 오히려 민족주의 사학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국수주의사관이 본격적으로 확대재생산된 것은 [환단고기] 출판 이후 민족종교와 결합하면서 부터인데, 이를 5공화국 군부정권이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하면서부터입니다. 단군조선의 진위를 가리는 국회청문회를 여는가 하면, 육사생도 들에게 관련도서들을 교양서로 읽혔다고 합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다물’, ‘퇴마록’, 김진명의 역사판타지 소설들과 만화 천국의 신화등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의 사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근래에는 수구세력과 결합하여 유사 민족주의로 변질되고 있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 두 장 올립니다.

 

[간도 수복론]

 

간도 수복론은 백두산 정계비의 재해석으로 촉발되는데요. 그 역사는 이러합니다.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의 상당수가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되자, ()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

 

1712(숙종 38), 백두산 천지의 남동쪽 4 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 그러나, ()의 목극등(穆克登)'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현지답사를 부실하게 하여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기사대흉년), 1870(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강(두만강)의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과 정해년(1887)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 이때까지 조선은 토문강-송화강선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 토문강- 해란강- 두만강 선을 국경으로 주장하였으며, 송화강 지류 토문강 - 송화강이 국경이라는 인식은 청일 전쟁 이후에 나온 것이다.

 

한편 서간도 지역에 대해서도 지방관 차원에서의 실효적 지배 추진이 있었다. 1869년에 강계군수는 자신의 권한 아래서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면으로 나눠 7개면은 강계군, 8개면은 초산군, 9개면은 자성군, 4개면은 후창군에 속하게 하였다.

 

1903(광무 7)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10- 19055)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후 일본은 한일합방을 추진하였다. 1905년에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조선은 일본의 중개를 거쳐 조약을 맺는다는 내용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간도가 필요했다. 일본 제국은 1907823,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