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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일본 전국시대와 ‘무뎃뽀’의 어원

일본 전국시대와 무뎃뽀의 어원

2016년 6월 25일

[출처신석준의 고전산책

 

무대뽀는 일본에서 실제로 쓰이는 말입니다. 뜻도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대로 무모하다’, ‘대책 없이 막 간다’, ‘무식하게 밀어붙인다로 똑같고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거친 한국말에는 일본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무대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무대뽀는 원래 한자로 무철포(無鐵砲)로 쓰고 정확하게 읽으면, むでっぽう[무뎃뽀:]입니다. 일본말로 뎃뽀(でっぽう, 鐵砲)는 대포가 아니고 조총(鳥銃)입니다. 따라서 무뎃뽀(無鐵砲, むでっぽう)조총이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조총이 없다는 말이 왜 무모하다’, ‘대책 없이 막 간다는 뜻이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꽤 긴 사연이 있습니다.

 

 

다케다 신켄(武田信玄)풍림화산(風林火山)’

 

일본 전국시대(1467-1590)에 다케다 신켄(武田信玄, 1521~1573)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켄은 지금까지 일본 역사에서 제일의 전략가로 꼽히며, ‘그의 마음이 움직이면 천하도 움직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출중한 무예에 탁월한 외교 감각을 갖추었고,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였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으며, 인재를 귀하게 여기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케다 신켄)

 

신켄은 그의 나이 52세에 일본 전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의 연합군을 전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것이죠. 훗날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나는 군사적 전술을 모두 신켄에게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신켄이 이처럼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만든 당시 일본 최강의 기마 군대 풍림화산(風林火山)’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켄은 자신이 지향하는 전략, 전술을 잘 표현하는 구절을 손자병법에서 따와 깃발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풍림화산(風林火山)’인데 원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其疾如 風하고 其徐如林하고 侵掠如火하고 不動如山하고 難知如陰하고 動如雷震이니라.

- 손자병법

한 번 해석해 볼까요? “그러므로 (군대의 움직임은) 그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그 느리기는 숲과 같으며, 치고 빼앗는 것은 불과 같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아야 하고, 알 수 없기로는 어둠과 같아야 하며, 움직일 때는 천둥이나 벼락같아야 한다.”

 

실제로 신켄의 풍림화산은 이런 군대여서 당시 일본의 모든 세력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최강의 기마군단 풍림화산을 이끌던 신켄은 오랫동안 앓아오던 병 때문에 5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다케다 가쯔요리(武田勝賴), ‘무뎃뽀로 돌격하다

 

신켄이 이끌던 풍림화산을 이어받은 신켄의 아들 다케다 가쯔요리(武田勝賴)와 신켄에게 밀려 멸망 위기에 처해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미카와(三河·현재의 아이치 현)의 나가시노(長篠)에서 결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커다란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포르투갈에서 들어온 조총(鳥銃)의 등장이죠.

당시의 조총은 화승에 불을 붙여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그 힘으로 총알이 튀어나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총은 1분에 한 발도 발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울러 조총의 사거리는 50m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보면 적의 얼굴에 있는 점이 보일 때쏴야만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화약은 손으로 재어 넣었는데 양이 적으면 발사가 안 되고, 양이 많으면 폭발해 사수가 크게 다치기도 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기록화)

 

그런데, 조총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깊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할 새로운 전술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마방책(馬防柵)과 조총부대의 새로운 이용법이었습니다. 마방책은 기마대의 돌격을 막는 목책(木柵), 요즘으로 말하면 바리케이트 입니다. 노부나가는 전장인 나가시노에 먼저 도착해 3중으로 마방책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발사 간격이 긴 조총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3000정의 조총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대비합니다. 첫째 줄이 총을 쏘고 앉으면, 둘째 줄이 쏘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줄이 쏘고, 그 사이에 준비가 된 첫째 줄이 다시 총을 쏘는 방식이죠.

 

노부나가 군이 이런 철저한 작전을 세운 것도 모른 채 다케다 가쯔요리는 기마대 15천을 이끌고 자신만만하게 전장에 도착합니다. 고지에 위치한 다케다군은 그 유명한 풍림화산기마부대로 돌격하여 노부나가 군을 분쇄할 작정이었습니다.

 

마침내 전투는 시작되고, 야마가타 아키카게(山縣昌景)를 선봉으로 한 다케다 군은 그야말로 조총도 없이무뎃뽀(無鐵砲, むでっぽう)로 돌격합니다. 그러나 다케다 군은 높다란 마방책과 엄청난 수의 조총부대에 가로 막힙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8시간 만에 다케다 군은 전멸합니다. 전투가 끝나고 다케다 가쯔요리 뒤를 따르는 병사는 겨우 6명이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이후 일본 최강을 자랑했던 다케다 가문의 풍림화산기마대는 영원히 재건되지 못합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조총이 없다는 뜻의 무뎃뽀’(無鐵砲)무모하다’, ‘대책 없이 막 간다’, ‘무식하게 밀어붙인다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일제시대 조선에 들어와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맞붙었던 조선의 신립(申立)조총도 없이무뎃뽀(無鐵砲, むでっぽう)로 돌격하다 군대는 전멸하고 자신은 달래강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아마도 고니시는 신립과 전투에 앞서 웃음을 짓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17년 전에 개발된 전술을 조선군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고니시가 조선군을 무뎃뽀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