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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모음

장정일의 재미있는 연작시 두편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사나이
                                                             장정일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쓴다
그리고 동글동글한 자신의 필체를 바라보며
그녀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이해 할 수 없다
도대체 남편은 몇 겹의 문을 걸어잠그는 것인가
그녀는 남편이 느끼는 삶의 중심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라고 그녀는 쓴다
두 명의 남자와 싸워온 칠 년 간 그 칠 년 간
두 명의 남자와 한 지붕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
남편이 걸어잠근 방문 주위를 서성여야 했던
그녀의 난처한 결혼 생활. 아무래도 그녀는
남편의 칠 년 간을 이해할 수 없다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사나이. 라고
그녀는 쓴다. 그리고 계속해서 쓴다
동글동글한 필체로 그녀는 쓴다. 남편은 퇴근해서
저녁을 먹는다. 라고 저녁을 마친 남편은
영사기가 설치된 취미실로 간다. 라고
그녀는 쓴다

남편은 어린 딸의 재롱에 흥미가 없다.라고
그녀는 쓴다. 매일 저녁. 이것 봐요
당신 아이 노는 모습 좀 봐요. 할 때
남편은 얼마나 심드렁한가. 난
영사기나 손보겠어. 이것 봐요. 할 때마다
난 영사기나 손보겠어

남편은 험프리 보가트에게 미쳤다. 라고
그년는 쓴다. 그러나 곧 그것을 지우고
험프리 보가트에겐 남편을 매료케 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라고 고쳐 쓴다. 그리고 이 문장이
완곡하게 표현된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미쳤다. 라고 쓸 용기가 서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재미로 같은 영화를 칠 년간이나 본담?
어려운 삶! 이라고 그녀는 쓴다.그녀는
한참 생각한 다음 <어려운 삶!>이란 문구를
북북 지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쓴다.
매일 저녁 호기심에 가득 찬 남편이
아직, 누구에게도, 험프리 보가트은 , 이해되지 않았다.
고 중얼거리듯이 그녀는 자꾸 쓴다.
이해 못할 삶!이라고


 

 

실비아 플라스*에게 빠진 여자

 


                                                            장정일

     
어제 저녁, 나를 주제로 시를 쓰면서
그녀는 나에게 모욕을 가했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 할 수 없다고 운을 맞추어 가며
그녀는 나를 우스꽝스러운 동성연애자로 각색했다.
험프리 보가트에게 빠지다니, 빠진다는 표현은
얼마나 잘 숨기어진 외설인가?

 

나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이해할 수 없다니?
나는 그녀가 풀려고 애쓰는 퍼즐 게임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녀가 읽어주는 실비아 플라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여보 실비아는 이렇게 썼어요
여보 실비아가 놀랍지 않아요? 아아 지겨워라
실비아에겐 어떤 섬칫함이 있어요. 아아 지겨워
가령 <피의 분출은 시>*이라거나 <나의 시간, 시간은 허영과 결혼했어요> 같은 구절은
자살하기 전의 실비아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지요

 

그러고서 담배 한 대를 길게 붙여 물거나
위스키 속의 얼음을 짤랑짤랑 흔들어 마시며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놓는다.
우리는 사랑과 슬픔의 핵우산 아래 있지요
다시 얼음을 짤랑짤랑 흔들어 마시며
더할 수 없게 슬픈 어조로,
성인들에겐 상처입을 영혼이 있지만
우리에겐 상처입을 영혼조차 없지요.

 

아무래도 그녀는 미쳤다.
원고지 앞에 멍청히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리는
아내는 미쳤다.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구
할 때마다. 몽상가들이 꿈꾸는 것은 바로
현실입니다. 제발, 할 때마다
몽상가들이 꿈꾸는 것은 현실입니다.

 

 

* Sylvia Plath, 1932~1963. 미국의 여성시인

* < > 속의 말은 실피아 플라스의 싯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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