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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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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항 흐린 근경의 섬들이 어둠을 끌어 안으며 초여름의 긴 하루를 마치고, 바다로 나갔던 어선들이 저 마다의 항로를 끌며 늦은 항구에 돌아오면 또 얼마 만큼의 그리움이 빈 해안에 떠밀려오는가. 등대, 내 고단한 희망의 별이여. 꿈꾸지 않는 해안에서 너는 밤을 새워 눈부신 희망을 흩뿌리는데, 멀리서 오는 스산한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그리운 이의 귀항을 나는 기다린다. 등대여.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워서는 안된다. 남겨지는 일이 떠나는 것보다 몇십배, 몇백배 아름답고 힘겨움을 아는가. 그리운 이여. 그대 미망의 그물을 거두지 못하고 먼 길을 서성이는 이여. 머리 위로 잔별 스러지고, 새벽하늘 너머로 꿈결처럼 아득하게 예인선 불빛 가물거린다.
퇴계원에서 늦여름의 퇴계원에는 물새가 날지 않는다. 겹겹이 늘어선 가로수 너머로 별 뜨지 않고 투명한 어둠, 혹은 황혼의 긴 그림자 안개처럼 무겁게 어깨 위에 내릴 뿐. 무성한 포프라 서걱이는 흐린 의식의 한 때를 한줄기 소나기 날카롭게 횡단하고 내가 내미는 손 너머로 완행열차 달려간다. 고단한 항해을 끝내고 이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들며 명료한 비애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늦여름 장미의 아득한 향내 너머로 그대와 나의 길고 긴 사랑노래를 흩어 버리고 결별과의 굳은 악수를 나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나 보내기 위하여 날마다 여름꽃 흐드러지게 피는 늦여름의 퇴계원에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든다.
겨울 희망 눈보라 속에서 꿈꾸었네. 엉겅퀴 마른줄기 황무지의 끝으로 손 흔들 때, 우리 절망의 상공으로 떠오르는 꽃송이. 눈보라 속에서 핏빛으로 찬연하게 타오르는 꽃송이. 차가운 바람 대지를 핡퀴고 갈대들 사납게 울부짖으니 그대에게 가는 길 더욱 찾을 수 없어 우리의 꿈은 참혹하여라. 그러나, 귀 기울이면 언땅 깊은 곳에서 오랜 그리움의 꽃씨 움트는 소리 꽃씨 깨우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눈보라 속에서 꿈꾸었네. 참혹한 꿈의 문의 열고 그대 기어이 돌아와 잔설 드리운 들에 화사하게 꽃피우는 꿈.
1985년 베이루트, 서울 아직도 베이루트의 거리에는 넝쿨장미가 피고 있을까. 철거민들의 천막에선 잡혀간 아빠를 기다리는 계집아이의 기도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울부짖는 팔레스타인 난민선 주위를 떠다니던 지중해의 갈매기떼는 철거민들의 가난한 꿈속으로 떠밀려와서 어느 아파트 옥상 위에 집을 짓는가. 황해의 눈발을 휘몰아오며 북서풍은 밤새 천막 위에 울고 얼어붙은 하늘이 와르르 와르르 내려 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