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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날의 기억

퇴계원에서

 

늦여름의 퇴계원에는 물새가 날지 않는다.

겹겹이 늘어선 가로수 너머로 별 뜨지 않고

투명한 어둠, 혹은 황혼의 긴 그림자

안개처럼 무겁게 어깨 위에 내릴 뿐.

 

무성한 포프라 서걱이는 흐린 의식의 한 때를

한줄기 소나기 날카롭게 횡단하고

내가 내미는 손 너머로 완행열차 달려간다.

 

고단한 항해을 끝내고
이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들며

명료한 비애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늦여름 장미의 아득한 향내 너머로

그대와 나의 길고 긴 사랑노래를 흩어 버리고

결별과의 굳은 악수를 나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나 보내기 위하여

날마다 여름꽃 흐드러지게 피는

늦여름의 퇴계원에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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