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꼰도’, 이승과 저승이 공존하는 세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번역된 것들도 있다)은 복잡한 서사구조 때문에 중반 정도까지 참을성 있게 읽어야 소설의 진정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설이야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으니, 굳이 말을 보태지는 않겠다. 다만, 내 인생 최고의 소설 몇 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한 자리를 비워 놓아야할 것이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죽음’에 대한 관념. 소설의 공간 ‘미꼰도’에서는 이승과 저승,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진다.
가문 최초의 남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어느날 찾아온 집시 멜키아데스(외래문명 전달자)와 친구된 것이 계기가 되어 느닷없이 과학 실험과 철학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미쳐서 집 앞 밤나무에 스스로 묶인다. 스스로 밤나무에 묶인 채로 24시간 자고 먹고 생활하는 것. 그리고 그는 자기만의 정신적 세계에 빠져 들어가 그대로 죽음을 맞는다. 죽은 후에는 그 자리에서 유령으로 머물며 종종 아내 ‘우르술라’가 신세한탄을 하는 걸 들어주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늘상 보이는 존재이다.
가문 최초의 여자, ‘우르술라’는 늙어 죽음이 다가오자 마을 사람들에게 저승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안부편지를 맡기라고 한다. 며칠에 걸쳐 배달할 안부편지를 챙긴 후, 그녀의 몸은 점점 쪼그라들어, 마침내 갓난아기 만큼 작아져 요람에서 죽는다.
도시 위에서, 1914-1918, 캔버스에 유화, 139 x 197cm, 국립트레티아코프갤러리, 모스크바, 러시아
미녀 ‘레메디오스’는 인간세계의 인습을 초월한 인물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백치에 가까운 아름다운 처녀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 어떤 남자든 한번 보면 죽음을 느낄 만큼 깊은 매력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남자는 모두 죽는다. 어느 날 미녀 ‘레메디오스’는 마당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중 그냥 뜬금없이 이불에 감싸여 승천한다. 그 장면은 이렇다.
‘아마란타는 자기가 입고 있던 속치마의 레이스가 신비스럽게 떨림을 느꼈고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담요를 움켜쥐고 바둥대는 순간, 미녀 레메디오스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거의 장님이 다 되다시피 한 우르슬라만이 그 신기한 바람이 왜 불어오는지를 이해할 만큼 침착했으며, 그래서 광선이 이끄는 대로 담요가 불려가도록 손을 놓았고, 미녀 레메디오스는 자기를 떠받치고 공중으로 떠올라서 날개를 치는 담요의 한복판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고, 풍뎅이와 다알리아가 있는 정원을 뒤로 두고 오후 네시의 하늘을 날아올라서,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좇아가지 못할 만큼 높은 창공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물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발췌한 부분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소설에서는 외래문명에 의한 침탈과 전쟁, 내전과 파업, 대량학살과 은폐조작 등 콜롬비아의 슬픈 역사를 환상과 상징을 통하여 우의적으로 보여준다. 마르께스는 이 처절한 고통의 역사를 보듬고자 이와 같은 마법적 장치를 도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마꼰도'의 소박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웃 집 마실 가듯이 그렇게 떠나고, 죽은 자는 존재 형태만 달라졌을 뿐 살아있는 인간과 자연스럽게 소통한다. 삶과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좀 더 쿨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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