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두 얼굴
2016년 7월 12일
며칠 전 케이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려 1962년에 제작된 ‘인목대비’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과 시각에 대한 설명은 출연진으로 간단히 정리가 되더군요. 광해군 역에 ‘허장강’, 능양군(인조) 역에 ‘신영균’, 인목대비 역에 ‘조미령’, 이 정도면 내용은 설명이 필요 없을 듯.
몇 년 전에 이병헌이 광해군 역으로 열연한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의 인기에 편승하여 대중매체는 물론 학계에서도 광해군 시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고, 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재조명이 필요한 역사인물 1위로 광해군이 선정되었다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내내 폭군으로 평가되었던 광해군을 최초로 재평가한 인물이 일제 강점기 만선사관의 주창자 '이나바 이와카치'라고 합니다. 이를 계승한 것이 강단사학계의 이병도, 광해군을 탁월한 군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시각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대략 자료를 검색을 해보니, 학계에서는 세자 시절의 분조활동과 자주외교정책에 관해서는 이견 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내치 분야에서는 이견이 분분하군요.
대동법의 시행은 조선의 제도개혁 중 대단히 중요한 정책인데, 의견이 갈립니다.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 시행하였다는 주장과 오리 이원익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주장이 있어요.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사사한 것은 권력의 속성 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봅니다만, 재위 기간 중 숫한 역모사건을 의도적으로 키워(?) 인명을 도륙한 것은 세자 시절의 불안했던 입지를 감안해 주더라도 관료사회의 균형을 붕괴시킨 실정이라고 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도한 궁궐공사, 전후 복구공사 수준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그 규모와 집착이 무모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창덕궁으로 시작해서, 경덕궁, 인경궁까지 재위 기간 내내 궁궐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신첩 발급(매관매직)을 독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백성을 또 한 번의 전란으로부터 보호하였으니 명군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권력강화에 몰두한 우매한 군주라고 할까요? 적어도, 영화 속의 멋진 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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