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깃발&바위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와사등 / 김광균 와사등(瓦斯燈)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울로 어데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 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여름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형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서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장정일의 재미있는 연작시 두편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사나이 장정일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쓴다 그리고 동글동글한 자신의 필체를 바라보며 그녀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이해 할 수 없다 도대체 남편은 몇 겹의 문을 걸어잠그는 것인가 그녀는 남편이 느끼는 삶의 중심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라고 그녀는 쓴다 두 명의 남자와 싸워온 칠 년 간 그 칠 년 간 두 명의 남자와 한 지붕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 남편이 걸어잠근 방문 주위를 서성여야 했던 그녀의 난처한 결혼 생활. 아무래도 그녀는 남편의 칠 년 간을 이해할 수 없다 험프리 보가트에 빠진 사나이. 라고 그녀는 쓴다. 그리고 계속해서 쓴다 동글동글한 필체로 그녀는 쓴다. 남편은 퇴근해서 저녁을 먹는다. 라고 저녁을 마친 남편은 영사기가 설치..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벗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채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 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