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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기형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詩의 시대를 추억한다 詩의 시대를 추억한다. 마지막으로 시집을 사서 읽은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기껏해야 아침 저녁 전철 플랫폼에 적혀있는 시민공모작을 건성으로 보거나, 더러 SNS에 포스팅 되는 시를 가끔 읽는 정도가 되었다. 한 시절 가방에 늘 시집 한 권쯤은 담고 다녔고, 족히 수백 권 넘게 시집을 사 모으던 사람이 이 지경이니, 이 시대의 시인들은 밥은 먹고 사는지? 그래도 영영 잊은 것은 아니어서, 최근에 재북시인 백석을 발견한 것을 위안이라 해야겠다. 시문학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딩 입학 후, 개성 넘치는 국어선생님 두 분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한분은 홍석원 선생(필명 홍강리), 대학시절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셨다. 노래로도 알려진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하면 아실만한 ..
수호지에서 묵향까지 '수호지’에서 ‘묵향’까지 (신조협려의 소용녀 싱크로율 100%, 유역비) 이글은 순전히 무협 덕후들과 무협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작성합니다. 내가 무협의 세계에 들어선 것은 고1 때, 삼국지와 수호지의 영향이다. 이때부터 만화가게에서 대만의 와룡생, 고룡, 양익의 해적판과 위작들을 빌려 보기 시작하여, 3세대 신무협 ‘묵향’까지 꾸준히 섭렵하였다. 고딩 때 읽은 한국작가들의 무협지들은 도색잡지 수준의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가 또 하나의 재미였다 (결국, 그런 식의 선정적 경향 때문에 몰락하지만). 대학 시절 학교 앞 ‘모심만화’는 만화/무협 마니아들의 휴식처였다. 임모, 권모 선배와 친구들이 자주 가던 곳이다. 물론, 당시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던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과 이현세/박봉성의 극화들을..
이소룡에서 견자단까지 이소룡에서 견자단까지 내가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1973년, 초등 3학년 때였다. 어느 여름 밤, 옆 동네 사촌형님들을 따라 십리 길을 걸어 읍내 극장에 갔었다. 그때 세상에 나와 처음 본 영화가 ‘흑연비수’, 홍콩 무협영화였다. 무협영화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특별한 행운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시골에서 영화를 보는 기회는 마을 공회당 앞에서 일년에 한번 상영하는 반공영화가 전부였다. 다행히, 4학년 무렵부터는 집에 TV가 생기긴 했지만. (이런 연유로 70년대 초반의 검객영화들과 왕우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다시 영화를 접하게 된 건, 1978년 중학교 2학년 때 청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학생들에게 극장출입이 허용되는 날은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하는 ..
영화, 나의 취향 어린 시절, 쥘 베른의 ‘해저 이만리’를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 비치된 어린이 과학잡지를 통해 우주왕복선이 실현되기 훨씬 전에 ‘스페이스 셔틀’과 액체질소에 대해 알았고, 장래 희망이 과학자였다. 고등학생이 돼서 내가 그쪽 머리는 아닌 걸 깨달았지만. (인셉션) 그래서인지 나는 SF(공상과학이 아니라 과학소설로 번역함이 옳다.)와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무척 좋아한다. 근래 이 장르 최고의 영화는 ‘인셉션’. SF 블록버스터는 최근 한해에 한편씩 이어지고 있다. ‘그래비티’, ‘인터 스텔라’, ‘마션’까지. 그래서 좋다. 스페이스 오페라로는 중학생 시절부터 보기 시작한 ‘스타워즈’ 시리즈를 빼놓지 않고 본다. 조지 루카스는 이 세계관 하나로 40년을 우려먹고 있다. 그 장르의 믿고 보는 감독은 '크리스토..
문학, 나의 취향 어린 시절부터의 내 평생의 취미는 단연 독서와 영화보기이다. 좀 자랑삼아 말하자면, 어린 시절 시골학교의 문고에 있는 책들을 다 읽어치우고는 더 읽을 게 없어 누이들의 중고등 국어교과서와 사촌 형님이 구독하는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까지 두루 섭렵했다.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안력이 약해지면서, 책읽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이제는 책을 보려면 돋보기안경을 써야 하는 처량한 나이가 되었다. 전에 직장생활 할 때, 보고서 글자 폰트를 큼직큼직하게 해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책읽기와 영화 취향도 바뀌어 간다. 무겁고 심각한 주제 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쪽으로. 젊은 시절의 지나친 독서 편식의 반작용인지, 아니면 생각이 점점 얕아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누..
유교문화의 빛과 그림자 유교문화의 빛과 그림자 2016년 7월 10일 나는 한국의 경제성장, 나아가 한국인의 역동성과 민주화의 근원을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한다. 하나를 더 보태자면, 사계절이 분명한 기후 환경. 박정희의 위대한 영도력과 1세대 재벌 창업주들의 뛰어난 안목이 결정적인 요소인양 숭앙하는 해괴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말이다. 기후의 영향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동남아 여행을 가서 드는 첫 번째 느낌은 ‘사람들이 참 유순하고 느리다.’라는 것, 좀 더 곱씹어 생각해보면 ‘이 날씨에 우리처럼 무지막지하게 일하다가는 금세 지쳐 죽겠다’는 것, 우리나라처럼 혹독한 겨울이 없으니,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살만 하겠다는 것이다. 환경의 차이를 무시하고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