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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원에서 늦여름의 퇴계원에는 물새가 날지 않는다. 겹겹이 늘어선 가로수 너머로 별 뜨지 않고 투명한 어둠, 혹은 황혼의 긴 그림자 안개처럼 무겁게 어깨 위에 내릴 뿐. 무성한 포프라 서걱이는 흐린 의식의 한 때를 한줄기 소나기 날카롭게 횡단하고 내가 내미는 손 너머로 완행열차 달려간다. 고단한 항해을 끝내고 이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들며 명료한 비애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늦여름 장미의 아득한 향내 너머로 그대와 나의 길고 긴 사랑노래를 흩어 버리고 결별과의 굳은 악수를 나눈다.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나 보내기 위하여 날마다 여름꽃 흐드러지게 피는 늦여름의 퇴계원에서 그대와 나는 손을 흔든다.
겨울 희망 눈보라 속에서 꿈꾸었네. 엉겅퀴 마른줄기 황무지의 끝으로 손 흔들 때, 우리 절망의 상공으로 떠오르는 꽃송이. 눈보라 속에서 핏빛으로 찬연하게 타오르는 꽃송이. 차가운 바람 대지를 핡퀴고 갈대들 사납게 울부짖으니 그대에게 가는 길 더욱 찾을 수 없어 우리의 꿈은 참혹하여라. 그러나, 귀 기울이면 언땅 깊은 곳에서 오랜 그리움의 꽃씨 움트는 소리 꽃씨 깨우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눈보라 속에서 꿈꾸었네. 참혹한 꿈의 문의 열고 그대 기어이 돌아와 잔설 드리운 들에 화사하게 꽃피우는 꿈.
1985년 베이루트, 서울 아직도 베이루트의 거리에는 넝쿨장미가 피고 있을까. 철거민들의 천막에선 잡혀간 아빠를 기다리는 계집아이의 기도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울부짖는 팔레스타인 난민선 주위를 떠다니던 지중해의 갈매기떼는 철거민들의 가난한 꿈속으로 떠밀려와서 어느 아파트 옥상 위에 집을 짓는가. 황해의 눈발을 휘몰아오며 북서풍은 밤새 천막 위에 울고 얼어붙은 하늘이 와르르 와르르 내려 앉고 있었다.
아침풍경 새벽이면 산들이 먼저 깨어났다. 먼 산은 흐릿하게, 가까운 산은 또렷하게 새벽을 맞았다. 푸른 강물이 기지개를 켜며 물안개를 피워올리면, 물가에 서있는 미루나무 새순들은 아침 단장으로 분주했다. 밤새 울던 여울물은 다소곳이 오랑개꽃들을 피워 냈으며, 얕은 개울과 느린 강물이 만나는 합수머리 자락에 펼쳐진 초록숲에서는 새들이 분주히 날아 올랐다. 사랑방 아궁이에서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타닥타닥 타들어갔고 무쇠 가마솥에서 쇠죽 끓는 소리 틈새로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재채기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찬 우물을 길어 감은 머리를 갈래로 땋은 누이들은 읍내 여학교 등교 준비가 분주했다. 숯불을 담은 다리미로 하얀 교폭칼라를 다림질 했고, 양은 도시락에 담긴 갖 지은 밥알들이 달착지근한 김을 올렸다. 밤새 식었던 아랫목..
사월 뒤뜰 해묵은 모란이 새순을 내밀고 뜨락 돌 틈엔 어느새 민들레 피었네. 흰 나비 한 마리 꿈결처럼 지나가는 오후 비를 머금은 바람에 나뭇잎들이 화들짝 깨어난다. 마당을 쓸고 먼 산을 본다. 사월이다. (2011년 봄)
옛집 옛집에 돌아와 텃밭을 일구네. 봄비에 한뼘, 여름볕에 두뼘 자라나는 푸성귀들 보며 '그놈들, 참 대견하다.' 하시던 어머니 그리워하네. 옛집에 돌아와 밤이면 하늘을 보네. 잔별들 쏟아질 때 아버지의 노랫소리 들리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 속에는 수심도 많다.' 옛집에 돌아와 다시 강변에 앉아 시를 읽는다네. 다시 바람을 느끼고, 다시 나를 돌아보네. (2011년 여름)
애기똥풀 내려 왔구나, 애기별 간밤 꽃샘바람에 잔별 날리더니 어두운 세상 내딛는 발걸음 헛디디지 말라고 흔들리지 말라고 이렇게 내려왔구나, 이렇게 피어났구나. (2011년 봄)
일본 전국시대와 ‘무뎃뽀’의 어원 일본 전국시대와 ‘무뎃뽀’의 어원 2016년 6월 25일 [출처] 신석준의 고전산책 ‘무대뽀’는 일본에서 실제로 쓰이는 말입니다. 뜻도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대로 ‘무모하다’, ‘대책 없이 막 간다’, ‘무식하게 밀어붙인다’로 똑같고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거친 한국말에는 일본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무대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무대뽀’는 원래 한자로 무철포(無鐵砲)로 쓰고 정확하게 읽으면, むでっぽう[무뎃뽀:]입니다. 일본말로 뎃뽀(でっぽう, 鐵砲)는 대포가 아니고 조총(鳥銃)입니다. 따라서 무뎃뽀(無鐵砲, むでっぽう)는 ‘조총이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조총이 없다’는 말이 왜 ‘무모하다’, ‘대책 없이 막 간다’는 뜻이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꽤 긴 사연이 있습니다. 다케다 ..